모세가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을 부르러 사람을 보냈더니 그들이 이르되 우리는 올라가지 않겠노라. 네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이끌어 내어 광야에서 죽이려 함이 어찌 작은 일이기에 오히려 스스로 우리 위에 왕이 되려 하느냐. 이뿐 아니라 네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도 아니하고 밭도 포도원도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니 네가 이 사람들의 눈을 빼려느냐 우리는 올라가지 아니하겠노라. 모세가 심히 노하여 여호와께 여짜오되 주는 그들의 헌물을 돌아보지 마옵소서 나는 그들의 나귀 한 마리도 빼앗지 아니하였고 그들 중의 한 사람도 해하지 아니하였나이다 하고 이에 모세가 고라에게 이르되 너와 너의 온 무리는 아론과 함께 내일 여호와 앞으로 나아오되, 너희는 제각기 향로를 들고 그 위에 향을 얹고 각 사람이 그 향로를 여호와 앞으로 가져오라 향로는 모두 이백오십 개라 너와 아론도 각각 향로를 가지고 올지니라. 그들이 제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불을 담고 향을 그 위에 얹고 모세와 아론과 더불어 회막 문에 서니라. 고라가 온 회중을 회막문에 모아 놓고 그 두 사람을 대적하려 하며 여호와의 영광이 온 회중에게 나타나시니라. (민수기 16:12~19)
오늘 본문에서도 다단과 아비람은 여전히 고라의 편에 서서 모세와 아론을 대적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의 주장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으로 모세가 들이지 않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모세와 아론이 자신들을 죽이려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자신들에게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모세와 아론의 책임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세히 이 이야기를 생각해보면 모세와 아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원망하는 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해주신 땅 가나안을 자신들이 들어가지 못함으로 인해 원망과 불평이 하나님과 그 리더들에게 생긴 것입니다. 자신이 리더였더라면 그 땅에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라는 교만한 마음이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40년간 광야 생활을 하게 된 이유는, 10명의 정탐꾼의 믿음없는 보고를 이스라엘이 받아들이게 됨으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그들이 거절했던 결과 때문이었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잘못을 하나님과 리더들의 탓으로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 없음을 회개하며 돌이켜야 함에도 회개하지 않고 자신들을 신실하게 이끌어 주었던 리더들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는 것은 교만한 것이며,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애굽 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13절) 하나님의 구원 자체를 부정하는 말까지 하게 됩니다.
네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이끌어 내어 광야에서 죽이려 함이 어찌 작은 일이기에 오히려 스스로 우리 위에 왕이 되려 하느냐 (13절)
우리의 믿음이 떨어질 때, 차라리 구원받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 왜 하나님이 나를 이곳까지 부르셔서 고생을 하게 하시는가? 라는 불평과 불신을 드러낼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의심이 들 때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지 않으시는 분으로 생각되거나, 하나님이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되는 거짓말들이 들어오게 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죽기까지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약속에 언제나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고린도후서 1:20)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베드로후서 3:9)
하나님은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든지 '예'가 됩니다. 주님 안에 거할 때, 하나님의 약속이 온전히 우리 삶에 이루어질 줄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삶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또 우리가 그 약속을 믿지 못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약속 안으로 들어가는 열쇠는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가는 것에 달여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지 아닐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주님 안에 사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
고라는 하나님의 임재 가까운 곳에서 일을 했지만, 하나님의 임재를 모셔드리는 살아계신 주님을 뵙는 은혜를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는 종교적으로 하나님을 따랐을 뿐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 안에 안식을 누리는 은혜를 맛보지 못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는 살아계신 주님을 우리 안에 모셔드릴 수 있는 처소가 되는 축복입니다. 주님이 나에게 무엇을 해주실 것인가의 관심에서 벗어나, 주님을 모셔드리는 삶을 사는 것이 우리의 부르심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신부로 우리들은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고라의 영을 이기는 길은 주님을 모셔드리는 삶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임재 안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 되길 소망해 봅니다.
기도: 하나님 우리에게 약속하신 비전과 부르심을 신실하게 인도하고 계심에 감사드립니다. 또한 주님의 임재를 놓치지 않고 모셔드리는 삶이 되길 소망합니다. 주님을 더 알아가게 하시고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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